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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관리자(tour)    등록일     조회 1121      다운(14건/1개)

◈황룡사지◈

반월성과 안압지 동쪽에 있는 황룡사는 비록 남아있는 것이 건물과 탑 그리고 불상의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뿐이지만 그 규모나 사세가 신라 제일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1976년부터 7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담장 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281m,총면적 2만여 평으로 동양에서는 최대의 사찰이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이 밝혀졌다.


황룡사의 가람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 잡고, 중금당 좌우에 각각 회랑을 갖춘 동서 금당이 위치한 일탑삼금당의 독특한 양식이다. 초석만은 경주의 어느 절보다도 잘 남아 있어서 남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자리를 볼 수 있고 회랑자리도 분명하다. 산지가람에서는 산이 배경이 되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데 견주어 평지가람에서는 그런 아늑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황룡사에서는 가람배치를 남문3칸, 중문5칸, 목탑7칸, 금당9칸 강당 11칸으로 점차 칸수를 늘려 절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서는 아늑한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목탑터 옆에 흙을 쌓아 만든 언덕이 있는데, 여기에서 황룡사 전체의 규모와 가람배치를 확인해볼 수 있다.

황룡사가 창건된 것은 진흥왕 14년(553)의 일이다.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이래 흥륜사의 주지로 있을 정도로 불심이 높았던 진흥왕은 반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 이를 이상히 여겨 절을 짓게 되었다.

17년만에 1차 공사가 끝나고 진흥왕 30년(569)에 주위의 담장이 완성되었으나 주요 건물들은 미완성 상태였다.


다시 진흥왕 35년(574)에 이르러 유명한 본존인 금동장륙상이 완성되었고, 다시 선덕여왕 12년(643)에 이르러 자장의 권유에 따라 구층목탑이 착공되어 2년 뒤에 완성되었으니, 황룡사는 4대왕 93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된 대 사찰이다.

신라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친히 불사에 참례하였고, 외국의 사신도 자주 이 절에 와서 불상에 예배하였다. 신라가 망한 뒤 고려에 와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진 절이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렸다. 조선 시대에 저술된 「동경잡기」에는 "오직 장륙상만이 남아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그것마저도 볼 수 없다.

솔거가 그렸다는 이 절의 벽화 또한 유명하며, 현재 국내에 전해지고 있는 범종 가운데 가장 큰 것이라는 성덕대왕신종보다도 무려 4배나 크고 17년이나 앞서 주조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권3에 전한다.
"신라35대 경덕왕 13년(754)황룡사의 종을 주성 하니 무게는 49만7,581근이었다."

황룡사터 구층목탑터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로 유학 갔던 자장이 태화 못 가를 지나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황룡사의 호법용은 나의 장자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절에 돌아가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 하였다.
자장이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말하자, 선덕여왕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탑을 만들게 하였다. 정면과 측면은 모두 일곱 칸의 사각평면 형식이었다. 탑을9층으로 한 것은 1층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 등 아홉 개의 이웃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막기 위함이었다.


 


높이 때문에 여러 차례 벼락을 맞았고 또 지진 등으로 기울어져 다섯 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하였다는 사실이 경문왕 13년(873) 탑을 재건할 때 만들어 넣은 사리함내의 「찰주본기」(刹住本記)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 25년(1283) 몽고군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버렸을 때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초석과 심초석만이 남아있다.

이 심초석은 탑의 무게중심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구층목탑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m인데 여기에 높이가 183척, 상륜부가42척, 합해서 225척(80m)이나 되는 거대한 탑이 들어선 것이다.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며 요즈음 건물로 따지면 20층은 족히 될 터이다.

아비지는 백제 의자왕 때의 이름난 장인(匠人)이다. 신라 선덕여왕의 청에 응하여 신라에 가서 탑의 중심기둥을 세우던 날 밤에 본국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꾼 후 그가 탑 역사에서 손을 떼려 하였더니 문득 천지가 진동하고 사방이 어둑한 속에 한 노승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심주(心住)를 세우고 이내 간 데 없었다. 결국 아비지는 맘을 고쳐먹고 역사를 마쳤다고 한다.

황룡사터 금동삼존장륙상 대좌 정면 9칸 측면 4칸의 금당 안에는 높이가 일장 육 척이나 되는 거대한 석가여래삼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십대 제자상, 신장상 2구가 있었다. 신라 최고의 국보로 숭앙되었던 금동장륙상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도의 아육(아소카)왕은 불상을 조성하고자 세 번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때 태자가 전혀 이 일을 거들지 않기에 왕이 그 연유를 물었더니 혼자 힘으로는 공덕을 이룰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왕은 그래도 인도 전국을 다니면서 조성하려고 애를 썼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최후로 배에 구리 5만7,000근, 황금4만 푼과 삼존상의 모양을 그린 그림을 실어 바다에 띄워보내면서 인연이 있는 나라에 가서 조성되기를 빌었더니 드디어 배가 신라 울산 근처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바다를 지키던 관원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신라에서는 그 재료로 한번에 불상을 완성하였는데, 본존상의 무게만 3만5,007근에 황금 1만 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의 무게 1만2,000근에 금 1만 136푼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 금당 중앙에 남아 있는 3개의 석조대석이 바로 이 금동삼존장륙상을 안치하였던 대좌이다. 이 대좌의 크기로 보아 불상의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대좌는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가게 홈을 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인데 이러한 모양은 좌우 협시불의 대좌도 마찬가지이다.

황룡사에서 나온 유물들 목탑지의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사리 장엄구에서는 금제합, 명문판 염주, 청동방함, 은합 등이 나왔다.

유물로는 높이 20.1cm의 금동불입상과 높이 8.3cm의 금동보살 불두(佛頭)가 있다.
한편 황룡사 강당자리 북동쪽에서 출토된 높이 182cm, 최대 폭 105cm의 대형 치미는 우리 나라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유례가 없이 큰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이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치미는 길상과 벽사의 의미로 궁궐이나 절의 용마루 끝에 사용되던 장식기와 이다. 이 치미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위 둘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아래위를 끈으로 꿰어 묶었던 구멍이 있다.

또한 양쪽 옆면과 뒷면에 교대로 연꽃무늬와 웃는 모습의 남녀를 엇갈려 배치한 것은 그 유례를 살펴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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