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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관리자(tour)    등록일     조회 2175      다운(33건/1개)

◈석굴암◈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문화와 과학의 힘,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이며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이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하늘끝과 맞닿고 서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봉우리들이 하늘과 만나는 절경을 볼 수 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이어진 도로로 차를 타고 약 5km정도 올라가 주차장에 하차한 후 십여분 가량 산길을 걸어서 가면 석굴암이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던 것이다.

석굴암은 경덕왕10년(751)에 착공하였으며 김대성이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공사를 맡아 완성시켰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뉘어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돼 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축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추어 하나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우선 전실에서부터 배치된 조각을 살펴보면, 석벽 좌우에 팔부신중 4체씩이 각각 마주보고 있고, 연이어 금강역사가 한 체씩 서 있다.
일반 사찰과 견주어 보면 이들 조각은 사천왕문 같은 도입부에 속한다. 그러나 이 전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단정 짓기가 어렵다.

전실과 주실은 비도(扉道)로 연결돼 있다. 비도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두 체씩 조각되어 있다. 주실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둘러싼 공간으로 되어 있고 앞쪽 좌우에는 돌기둥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좌우에 차례대로 천부상 하나, 보살상 하나, 십대 제자상 다섯, 그리고 본존불바로 뒤에 십일면 관세음보살이 있다.

십일면 관세음보살 위로 본존불의 광배가 새겨져 있으며, 광배 양옆으로 각 다섯 개의 감실이 있다. 감실 안에는 문수, 유마, 지장 등 기타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다만 현존하는 것은 좌우 넷씩 모두 8체뿐이며, 나머지 두 감실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전실의 조각까지 합하면 현존하는 석굴암의 조각은 모두 38체로 저마다의 특징과 표정이 잘 표현되었다. 주실의 본존불은 일반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하고 관음상은 관음전을 다른 보살 군상들은 천불전쯤에 해당된다 하겠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본존불 바로 위에는 연화문을 새긴 하나의 큰 천개가 있다. 이 천개에는 석굴암을 지을 때 세 조각으로 갈라진 것을 천신이 다시 붙여놓고 갔다고 하는 김대성의 꿈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세 줄의 균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굴암 내부구조도]



석굴암이 창건된 이후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큰 변화 없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굴암에 유숙하면서 석굴암의 장관을 찬미하고 그 절묘한 솜씨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겸재 정선은 「교남명승첩」에 경주의 골굴암과 석굴암을 그려놓았다.

이 화첩은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굴암 입구에 목조 전실을 첨가하는 데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삼백 년 전 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일제 시대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가 마치 자신이 이 석굴암을 지하동굴에서 발굴한 양 과장 선전하여, 이후 일본의 무뢰한들이 우리의 수 많은 문화재급 유물들을 반출해 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제는 석굴전체를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한일합방으로 굳이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도 한다.

일제는 석굴암에 세 차례의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불상들의 위치와 석굴암의 정확한 구조를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습기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년을 넘게 버터 온 석굴암은 그 자체 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큼 우수한 것으로 자체적으로 환기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 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둘레를 막아버렸다. 결국 이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차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후 석굴암은 해방 뒤 혼란한 사회 속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가 1961년에 들어서서야 우리 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이 때는 이미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시멘트벽 때문에 내부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등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실내습도를 유지한다 하여 일차 시멘트벽 위에 공간을 띄어놓고 다시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러고는 따로 인위적인 환기장치를 석굴암내부에 마련하였다.

또한 석굴암에 악영향을 미치는 자연 조건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목조 전실을 설치하고 또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앞뒤로 외부와 완전 차단된 석굴암은 이제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습도나 온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해 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일반 관람객은 목조 전실로 들어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만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석굴암 석굴
국보 제24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 당시의 재상인 김대성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석굴암의 조각들은 심오한 믿음과 우아한 솜씨가 조화된 통일신라 시대의 가장 뛰어난 세계적인 걸작으로 한국 불교예술의 대표작이다. 굴 가운데에는 높이 3.48m의 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전실과 굴 입구 좌우 벽에는 팔부신장, 인왕 및 사천왕 등의 입상이 조각되어 불천을 지키고 있다.

굴 내부 본존불 둘레에는 천부입상 2구 보살입상 2구 및 나한입상 10구를 배열하고 본존불 바로 뒤에는 11면 관세음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굴 천장 주위에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안에 좌상의 보살과 거사 등이 안치되어 있다.

석굴암 삼층석탑
보물 제91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이 석탑은 화강석으로 만든 희귀한 삼층석탑이다. 탑의 지대석과 상.하갑석은 일반 석탑에서 볼 수 없는 원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중 기단 위의 중석은 팔각형을 이루고 있고, 그 위로 일반 석탑의 방형 삼층 탑신에 옥개석을 갖추어 건립하였다. 각 탑신에는 우주를 모각 하였고 각층의 옥개석 받침은 3단이며, 특히 이층 탑신에 비해 일층 탑신은 장대하고 옥개석은 평박 하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원형의 이중 지대석 위에 상, 하 팔각형으로 된 기단에 방형 삼층석탑 형식을 갖춘 특수한 형식의 석탑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현재 석탑의 높이는 3m에 달하며, 8세기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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