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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
관리자(tour)    등록일     조회 1378      다운(16건/1개)

◈무열왕릉◈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천교를 넘어 서악동 쪽으로 약 1.7km 가면 선도산 아래 태종무열왕릉이 나선다.

경주에 있는 많은 능 가운데 누구의 왕릉인지 단정할 만한 확증이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이 왕릉은 앞쪽에 태종무열왕릉비가 서 있어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인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무열왕은 통일의 위업을 완성할 무렵의 왕으로 그의 어머니는 26대 진평왕의 딸이자 27대 선덕여왕의 동생이었다.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원효와 인연을 맺은 이야기,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하게 된 이야기 등 무열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와 전설이 전 한다. 김유신의 누이와 무열능은 높이 약 12m, 밑 지름 약 100m의 큰 봉분으로 능선이 유연한 곡선을 그려 아름답다. 능 둘레에 자연석으로 1m쯤 석축을 쌓고 3m 간격으로 호석을 세웠으나 흙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다.왕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30대 문무왕이다.
별다른 장식이 없이 규모가 큰 삼국시대 초기의 능으로는 마지막에 속하며 이후로는 호석을 세우는 등 화려하고 장엄한 멋을 살린 통일신라 시대의 능이 시작된다.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무열왕릉비

문무왕1년(661) 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태종무열왕릉 앞쪽의 비각 안에 있다. 비신은 없어지고 그 위에 얹었던 이수와 비의 받침대인 귀부만 남아있다. 국내의 많은 귀부와 이수 가운데서도 대표가 될 만큼 조각이 크고 뛰어나며 남아있는 귀부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양쪽에 세 마리씩,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이수 한가운데에 '태종무열대왕지비' 라는 여덟 자가 두 줄로 내리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것이라고 한다. 김인문의 묘는 무열왕릉 앞길 건너편에 있다.

귀부는 막 걸음을 떼려는 거북이의 자세가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네 발로 힘차게 땅을 밀치는 모습은 신라의 황금기를 여는 무열왕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거북이의 앞발가락이 다섯이고 뒷발가락은 넷인데, 이는 거북이가 힘차게 나갈 때 뒷발의 엄지발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고 힘을 주는 모습을 암묵적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또 거북이가 힘을 줄 때 턱밑이 붉어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석의 붉은 부분을 거북이의 턱으로 삼았다.

거북이 등에 새겨진 구름무늬와 당초문, 보상화문, 머리와 목의 주름 그리고 입가에 입김과 콧김까지 새겨둔 조각의 치밀함이 볼수록 놀랍다. 이 비 하나만으로도 신라 예술의 우수성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악동 고분군


태종무열왕릉 뒤쪽으로 거대한 능 네 기가 일직선상에 나란히 서 있다. 고분의 둘레는 첫번째 능이 160m ,두번째가 186m, 세번째가 122m, 맨 끝의 것이 110m이다. 누구의 무덤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무열왕릉과 같은 영내에 있고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점들로 미루어보아 무열왕의 선조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고분군이 함께 있는 영내는 잘 자란 소나무들이 잔디와 어울려 깔끔한 공원처럼 조경되어 있다. 사적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인문 묘

태종무열왕릉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두 기의 고분 중 큰 것이 김인문의 묘이고, 다른 하나는 김양의 묘로 알려져 있다. 문인석이나 무인석, 석수도 없는 간소한 묘이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진덕여왕 5년(651)에 당나라에 일곱 차례나 왕래하며 삼국통일 전후 당나라와의 외교에 큰 공로를 세운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김양은 무열왕의 9대손으로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화평교섭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인문은 글씨도 잘 써 태종무열왕릉 비문을 썼다.

서악동 귀부

김인문묘 앞에 비각이 서 있고 그 안에 귀부가 하나 남아있다. 비신과 이수는 없어진 지 오래이다. 이 귀부는 전체적으로 태종무열왕의 비와 비슷하나, 무열왕 비에 견주어 전체적으로 형식화되고 약해 보인다. 그러나 무열왕릉 비를 보지 않고 서악동 귀부만 본다면 이 역시 매우 훌륭한 작품으로 여길 만하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무열왕릉비 귀부의 발가락이 앞이 다섯, 뒤가 넷 이었던 데 견주어 서악동의 귀부는 앞뒤 다섯 개라는 점이다. 정지해 있을 때와 전진할 때의 차이라고도 하나 그렇게 구별한 뜻을 알 길이 없다. 한편 1931년 근처의 서악서원 땅 밑에서 김 인문의 묘비가 발견되었으나 몹시 풍화되고 글자가 마멸되어 알아보기 곤란하다. 귀부의 비신을 세웠던 홈과 그 크기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파손이 심하여, 이 귀부에 김인문의 묘비가 세워졌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보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무열왕릉
사적 제20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아래 나지막한 구릉의 송림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본명이 김춘추인 태종무열왕은 신라 진지왕의 손자이고 이찬 벼슬을 하였던 용춘의 아들로 탁월한 정치력과 뛰어난 외교술로 삼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었던 삼국 말 혼란의 와중에서 신라를 지탱하게 하였다.

김유신 장군의 뒷받침을 받아 진덕여왕의 뒤를 이은 왕은 삼국 통일의 웅지를 품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재위 기간에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의 완성은 그의 아들 문무왕 때에 이루어졌다.

능은 원형 토분으로 둘레 110m, 높이 11m이며, 봉분의 아래에는 자연석으로 축대처럼 쌓고 큰돌을 드문드문 괴어놓은 호석을 둘렀는데 지금은 괴어놓은 큰돌만 보인다. 이와 같은 호석 구조는 경주 시내에 있는 삼국 시대 신라 고분의 호석 구조보다 한 단계 발전한 형식이다.

능 앞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 난 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 고 한다. 비신은 없어지고 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이수만 남아있다. 목을 길게 내밀고 등이 육각형의 귀갑으로 덮인 거북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옹건하게 조각된 귀부와 좌우 모두 여섯 용이 몸을 틀고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생동감 넘치는 이수는 통일신라 초기의 석조예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

이수 전면 중앙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라 새겨져 있는데 이 고본이 무열왕릉임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제25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이 비석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무열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비신은 없어지고 지금은 비의 대석이었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만 남아 있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통일 초기의 씩씩한 기상을 볼 수 있어 여의주를 받들어 올린 여섯 용을 새긴 이수와 더불어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칭찬이 높다.
그리고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 의 여덟 글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글씨라 전한다. 귀부의 길이 333cm, 가로86cm, 높이 254cm, 이수 높이 11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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