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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관리자(tour)    등록일     조회 965      다운(9건/1개)

◈감은사지

감포 앞 바다를 뒤로하고 대종천을 거슬러 0.5km쯤 올라가면 양북면 용당리다.

이곳에는 장대하고도 훤칠한 미남에 견줄만한 석탑 두기가 우뚝 선 절터가 있다. 절터가 들어선 곳은 일부러 주위보다 높게 다진 듯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
여기에 풍채가 거대하고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하는 삼층 석탑 두기가 나란히 서 있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용당산을 뒤로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문무왕이었지만 당시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성가시게 구는 왜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이듬해(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더욱 신빙성 있게 해주는 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금당 밑의 공간이다.

감은사탑은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 배치에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즉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 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좌우에는 동, 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 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 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금당의 바닥 장치는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대석 밑은 빈 공간이 되도록 특수하게 만들었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언뜻 보기에도 예삿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임이 확실하다. 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오른 두 탑은 크기로 보나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에 있어서나 신라를 대표하는 멋진 탑이라 단정하는 데 이의가 없다.

통일된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안정을 기원하는 뜻에서 감은사가 지어졌듯, 그 같은 시대정신은 웅장하고 엄숙하며 안정된 삼층 석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감은사탑은 튼실한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옥개석)의 끝이 경사를 이루는, 통일신라 7세기 후반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금당 뒤쪽 대숲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절터와 주변 경치가 어우러진 속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탑을 볼 수가 있다.

대종천 건너 아래쪽에서부터 두 탑을 올려다보는 것도 또 다른 멋이 있다. 감은사터는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감은사지
사적 제3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앙북면 용당리

감은사는 신라 문무대왕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고 난 후 부처의 힘으로 왜국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아들인 신문왕이 그 뜻을 좇아 즉위한 지 2년 되던 해인 682년에 완성한 신라 시대의 사찰이었다.

문무대왕은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 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바로 대왕암이며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여 사찰을 완성하고 이름은 감은사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부터 2년에 걸쳐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얻어진 자료를 통해 창건 당시의 건물 기초대로 노출 정비한 것이며, 아울러 금당의 지하에는 바다용이 된 문무대왕의 휴식을 위한 상징적인 공간을 마련한 특수 구조와 동쪽으로 통로를 만들었다고 하는 흔적도 밝혀놓은 것이다.

우뚝 솟은 두 삼층석탑은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서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운 것으로 전체 높이 13m에 이르는 신라 삼층석탑중 최대의 것이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의 뜻과 신문왕이 부왕의 은혜예 감사해서 지은 효, 즉 충효의 정신이 깃들인 유적이라 하겠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11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동서로 마주서 있는 이 탑은 신라 신문왕 2년 (682)에 세워진 석탑이다.
화강암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 중층의 이 탑은 동서 양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보인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각각 1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상층 기단은 면석을 12매로, 갑석은 8매로 구성하였다. 탱주는 하층 기단에 3주, 상층 기단에 2주를 세웠다. 초층 옥신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면이 한 돌, 3층은 전체가 한 돌로 되었다. 옥개석은 받침돌을 별석으로 각층 4매씩의 돌로 되었다. 그리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마다 5단의 층급으로 되었다.

상륜부는 양탑 모두 노반과 높이 3.3m의 철제 찰주가 남아 있다. 목조 가구를 모방한 형적을 보이며 옥개석 받침을 층단식으로 한 수법은 전탑의 전단계 모습을 추정케 한다.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이와 같은 양식은 이후로 한국 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또한 1960년 서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탑의 전체 높이는 13.4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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